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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정 현대사2 - 원시인이 낳은 최첨단 다리, 광안대교⑨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제2화 원시인이 낳은 최첨단 다리, 광안대교⑨

 

대한민국 건설사 길이 남을 부산자랑

 

광안대교는 부산시 도시행정의 브레인 역할을 해낸 행정·기술직 공무원들이 지혜와 혼신을 다해 만든 해상순환도로의 백미이자,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 시발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5년 전의 일이다.

 

당시 부산은 7개의 풀리지 않는 현안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름 하여 '3난(難) 4장(場)'. 하도 입에 붙어 보통명사처럼 쓰곤 하던 용어였다. 교통난·주택용지난·재정난(3難) 해결과 쓰레기매립장·화장장·연탄저탄장·분뇨처리장(4場) 확보야말로 부산시민의 안락한 삶을 지켜줄 최대 과제였다. 그중에서도 출퇴근 시간이면 도시 전체가 거대한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교통난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광안대교는 부산시 도시행정의 브레인 역할을 해낸 행정·기술직 공무원들이 지혜와 혼신을 다해 만든 해상순환도로의 백미이자, 아름다운 '작품'이다. 광안대교는 부산의 상징이요, 축제의 장소이면서 자존심이다. 부산시 행정·기술직 공무원들이 지혜를 모으고, 시민의견을 물어가며 혼신을 다해 만들어낸 결정체다. (사진은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민락 수변공원에서 여름밤 피서를 즐기고 있는 시민)

 

1987년 들어 부산시는 처음으로 교통기획과를 신설했다. 가장 시급하게 풀어야 할 화두를 교통난으로 잡고, 이의 해결을 책임질 전담부서를 신설한 것이다. 초대 교통기획과장은 허남식 현 부산시장이 맡고, 지금의 부산시 김효영 교통국장, 김영식 기획재정관, 전형섭 환경정책과장 같은 초초 명장들이 계장, 주무 등으로 포진했다.

 

"부산은 지형적으로 산이 70%를 차지, 도시 구조상 항만화물의 도심통과가 불가피했습니다. 우회도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교통기반시설이 절대 부족해 소통의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었습니다. 막혀도 돌아갈 길이 전혀 없었던 거지요."

 

신설부서에 배치받은 부산시 교통기획과 직원들은 장기적으로 광역전철과 지하철을 건설해 수송분담률을 올리고, 백양산, 수정산, 황령산 같은 도심 산을 뚫어 터널을 내며, 시의 남북과 동서를 잇는 도시순환도로망, 항만 배후도로를 건설하자는 쪽으로 지혜를 모아 갔다.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긴가민가한 사이 안상영 시장이 부임하면서 확신이 서고, 사업에 속도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술직 출신의 안 시장께선 서울지하철건설본부 건설차장, 서울시 도로국장, 도시계획국장을 지낸데다 서울시 종합건설본부장을 맡아 한강종합개발과 올림픽대로 건설을 주관하신 분이라 도시계획 분야에 밝았고 배포가 워낙 컸습니다. 부산교통난의 근본 해결을 위해 외곽순환도로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 청와대에 보고했습니다. 그 후 1990년 정부가 교통정비 기본계획 수립지침을 내리면서 부산순환도로 계획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이지요."

 

김영식 부산시 기획재정관의 기억이다. 그는 당시 교통기획과 주무를 맡았다. 안 시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밤샘이 시작됐다. 과장과 계장, 행정직원 3명과 토목직원 1명이 전적으로 이에 매달렸다. 본격적인 도시계획 선 긋기에 앞서 외국자료를 찾고, 교통 관련 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파리·런던 같은 대도시 교통체계를 탐색했다. 파리는 방사선 도시로 도시계획이 잘 돼 있었다. 참고할 점이 많았다.

 

컨테이너 같은 대형 운송차량의 도심통과를 최대한 억제하고, 보상비 등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함께 고려했다. 당시 교통기획과에서 5년 8개월을 근무한 전형섭 부산시 환경정책과장은 컬러복사기가 없던 때여서 중앙동 복사 집 주인을 깨워 밤 12시에 보고서를 복사하고 중앙부처 보고를 가는 상사들의 뒷바라지를 마다치 않았다고 기억한다.

 

지금의 부산 교통망 골격은 그런 과정을 거쳐 그때 만들어졌다. 항만 배후도로 10개년 계획 같은 것들도 그 무렵 마련했다. 당시 계획서에는 광안리 해저터널, 수영강 강변도로, 백양산 터널, 수정산 터널, 다대항 배후도로 같은 것들이 들어있다.

 

"지금 그 같은 도시계획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당시로써도 늦었지만, 그때라도 죽기 살기로 했기 때문에 부산이 오늘날의 교통 골격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대단히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광안리 해저터널 계획은 이후 다시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쳐 광안대교로 최종 결정 났다. 사업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인공섬 계획을 발표했지만, 실현단계까지 진행되지 않았다. 재원마련을 위해 항만 배후도로 특별회계를 만들고, 컨테이너세를 신설했다.

 

광안대교는 해운대 신시가지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노태우 대통령이 주택 200만 호 건립정책을 선언하면서 부산은 해운대 신시가지 건설로 가닥을 잡았다. 문제는 교통대책. 수영로 확장, 고가도로, 해변도로 개설방안 등을 검토했으나 답이 없었다. 결국, 바다를 택했고, 해상순환도로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광안대교 건설사업을 구체화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김영환 시장 때의 일이다.

 

1992년 9월 21일자 '부산시보'는 '우리의 부산, 21세기의 주역으로'라는 제목으로 부산의 장·단기 교통처리계획을 특집으로 다뤘다. 오늘날의 광안대교 골격과 비슷한 청사진 사진도 함께 게재했다.

 

광안대교는 단순한 '다리' 이상이다. 부산의 상징이요, 풍경이며, 축제의 장소다. 상하가 함께 고민하고, 행정·기술직 공무원들이 지혜를 모으고, 시민의견을 물어가며 혼신을 다해 만들어낸 결정체다. 부산 해상순환도로의 백미요, 대한민국 건설사에 길이 남을 부산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끝>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는 제3화 '문화시설 짓고 가꿔 문화불모지 오명 벗다' 편으로 이어집니다.

 

- 박재관

Trackback : 0 Comment : 1
  1. 궁금이 2013.02.14 18:0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부산의 도시고속도로 건설 역사도 알고 싶어요 ^^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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