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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반장의 부산이야기] 1,023일의 피란수도 부산



1950년 6월 29일 새벽 부산역의 모습은 아비규환이었다. 6․25전쟁발발 직후 한강철교가 폭파되고 서울역에서 출발하지 못한 피란열차는 6월 28일 저녁 대전역에서 피란민 약 500여명을 싣고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한 안도와 막막함도 잠시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렸다. 


“우리 아이가 없어요.. 누가 우리 아이쫌 찾아주세요.. OO야.. OO야” 


6․25전쟁이 발발하고 피란열차가 부산역에 도착할 때 마다 부산역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과 같았고 피란민들을 분류하고 신원을 파악하는 공무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부산은 6․25전쟁 기간 동안 한국 사람들에게 남쪽에 있는 가장 안전한 도시였고 삶을 위한 분주함과 아우성이 그치지 않았던 대한민국의 수도, 즉 피란수도였다. 6․25전쟁 1,129일 중 1,023일 동안 부산은 대한민국의 수도였다. 


▲임시수도 기념관


보통 부산을 6․25전쟁 당시의 임시수도 정도로만 간단하게 생각을 하면서 그 역할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고 전쟁을 피해온 ‘피란’을 ‘피난’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우선 ‘피난(避難)’과 ‘피란(避亂)’은 사전적 정의와 한자의 의미를 보아도 뜻이 다르다. 


피난은 재난을 피하는 것이고 피란은 난리를 피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뜻 밖에 일어난 홍수나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을 피해 옮겨가는 것이 피난이고 전쟁이나 화재, 작은 소동, 재앙을 피해 옮겨가는 것이 피란인 것이다.



따라서 6․25전쟁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란’을 왔고 대한민국 정부 역시 부산으로 ‘피란’을 와 처음에는 ‘임시적 피란 도시’로써의 기능을 생각했겠지만 전쟁은 길어졌고 3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한 나라의 수도 역할을 하였기에 6․25전쟁기간 동안 부산은 ‘대한민국의 피란수도’였다.


▲1950년대 초 국제시장(부경대 근대사료 연구소 김한근 제공)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6월 27일 대전과 7월 16일 대구를 거쳐 1950년 8월 18일, 부산은 마침내 1차 피란수도(1950년 8월 18일 ~ 1950년 10월 27일)가 되었고 1․4후퇴 이후 1951년 1월 3일, 2차 피란수도(1951년 1월 3일 ~ 1953년 8월 1일)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피란수도 부산에는 입법․사법․행정의 국가 3권 기능이 가능한 국가기관이 자리를 잡았고 교육, 의료, 문화 등 피란수도 정부기능을 수행하는 각종 기관들이 자리를 잡았다. 



정부청사는 경남도청(현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 보건부와 문교부, 사회부 등은 옛 부산시청(현 롯데백화점 광복점)에 사법부는 (구)부산지방법원(현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에 자리를 잡았고 국회 역시 부산으로 내려와 처음에는 부산극장을 의사당으로 쓰다가 나중에는 경남도청의 체육관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부산의 대청로를 중심으로 부민동, 중앙동, 광복동을 포함한 원도심 지역에는 피란정부의 주요기관들이 들어섰고 원도심 지역의 곳곳에는 수도의 역할을 수행 할 기관들과 학교와 단체들이 내려와 자리를 잡음으로서 부산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수도역할을 수행하였다. 


 종 유엔기구 및 각국의 대사관이 들어섰고 해외 원조물자와 인력이 드나들면서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이 되었고 문학인, 예술인들에게는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보장 받을 수 있는는 유일의 도시였다. 


부산의 인구도 피란민들로 인하여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1945년도 당시 28만 여명이었던 부산의 인구는 49년에 47만 여명 51년에는 84만 여명이 되었고 1955년이 되면서 100만 여명이 넘어섰다. 


1930년대 일제에 의해 1960년대 인구 30만명의 계획도시였던 부산은 엄청난 인구 과포화에 직면하면서 각 지에 만들어졌던 피란민 수용소(수용인원 약 7만)는 금방 차버렸고 피란수도 부산은 식량과 주택문제로 신음하였고 도심 주변의 산과 경사지, 하천변에는 움집과 판잣집이 빽빽하게 들어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1960년대 초영주동(부경대 근대사료 연구소 김한근 제공)


피란민들은 판자부스러기나 미군부대에서 나온 종이박스에 콜타르를 칠한 루핑지와 양철판 등으로 집을 지었고 그만한 여유도 없는 경우에는 땅을 파고 각목과 합판으로 벽을 만들어 가마니를 두른 움집을 지어 2~3평이 채 되지 않는 공간에서 한 가족이 생활하였다.   


화재의 위험과 최소한의 위생적 삶을 영위하기도 힘들어 각종질병과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식수와 식량문제, 겨울에는 추위로 늘 고통 가득한 삶을 살았다.



어떤 의미에서 피란수도 부산은 전쟁을 피해 찾아온 안도적 공간이었지만 안도적 삶을 살 수 없었던 역설적 공간이었던 것이다.


역설적 공간이자 고통과 혼란의 도시 부산에도 희망은 늘 존재했다. 


부산의 원주민들은 ‘한 방 비워주기’ 운동 등을 통해 집의 일부를 내어주기도 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서 피란민들을 안아주었고 피란민들은 국제시장에서 부두에서 날품팔이를 하며 자식을 키우고 희망을 키우며 삶을 이어나갔다.


피란수도 부산은 다양한 사람과 문화가 융합되는 용광로, 멜팅팟이었다.



원주민과 피란민이 하나 되는 멜팅팟이었고 부산문화와 피란문화가 만나는 멜팅팟이었으며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하나 되었던, 10인종과 문화가 하나 되는 뜨거운 멜팅팟이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피란수도 부산’을 등재하기 위해 ‘부산 최초의 세계유산 등재 프로젝트를 위한 기초연구’가 시작되었고 1차 보고서가 나왔다. 보고서를 보니 6․25전쟁당시 피란수도와 관련된 유형과 무형의 자산들이 현재 부산의 곳곳에 다양하게 산재하고 있고 비교적 보존이 잘 되고 있는 것들도 많아 다행스러웠다.



아직 준비단계이고 많은 시간들이 소요되겠지만 만약 ‘피란수도 부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면 부산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자랑스러운 일이 되리라 믿는다. 


부산에서 평생을 살아오면서도 부산에 관심이 없었고 부산에 대해 알아야 할 이유를 몰랐던 사람들에게도 부산인이라는 자부심이 생겨나고 또 다른 부산을 느낄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도 생겨난다.  


한국 근현대사의 거대한 축인 6․25전쟁과 피란수도 부산, 결코 현란할 수 없었던 1023일간의 시간속에서 피란수도라는 공간속에서 존재했던 부산인들의 삶의 의지와 희망은 아직도 무의식중에 면면히 남아있고 부산이라는 도시를 기억하고 지탱하는 톱니바퀴가 되고 있다. 


돌아오는 주말 가족들의 손을 잡고 또 다른 부산, 피란수도 부산의 향기를 찾아 떠나 보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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