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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반장의 부산이야기] 부산사람에게 부산을 묻는다


부산사람들에게 묻는다.

부산을 사랑하십니까? 부산은 왜 부산이라는 이름을 가졌을까요? 그렇다면 혹시 부산에 살면서 부산에 올라가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이 질문을 받는 대부분의 부산사람들은 황당해 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손반장에게 이 질문을 받았던 부산사람들의 표정은 니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노?’의 아주 황당한 표정이었다.


▲부산타워에서 바라본 북항재개발 현장


▲부산타워에서 바라본 자갈치남부민동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부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를 묻는다면 바다를 이야기 할 것이다. 그리고 부산사람들에게 만약 타 지역의 지인들이 부산을 찾아온다면 어디를 보여줄 것이냐는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은 주저 없이 넓고 포근한 백사장, 아름다운 풍경과 수평선이 잘 어우러진 절경, 활기찬 사람들의 이미지의 해운대, 광안리, 태종대, 자갈치 등의 명소들을 보여주겠다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하지만 부산하면 떠오르는 해운대, 광안리, 태종대, 자갈치라는 이미지의 건너편에는 또 다른 부산이 존재한다. 작은 골목골목을 타고 흐르는 가슴 저리지만 아름다운 역사와 이야기, 부산사람들이 억척스러움을 간직하고 살아가게끔 만든 소중한 가치들이 존재하는 부산이 존재한다.

 

부산은 현재 인구 350만이 넘는 광역시로서 대한민국 제 2의 수도이자 항만수도로써의 역할도 충실히 하고 있는 도시이며 바다와 산과 강 그리고 온천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품고 있는 도시이다. 동쪽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경상남도 진해시와 김해시, 남쪽으로는 다대만 · 부산만 · 수영만을 끼고 남해와 접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울산광역시 온양면 · 서생면, 경상남도 양산시, 김해시와 접하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15개 구, 1개 군, 2개 읍, 3개 면, 210개 동, 130개 리가 있으며 시청은 연제구 연산동에 있다.


▲이순신부산관광지도편집본 1474 부산포지도 출처 : 네이버


부산이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02128태종실록富山(부산)이라는 명칭이 처음보이며,경상도지리지(1425)』『세종실록지리지(1454)등에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東萊之富山浦)"라 하고, 같은 책삼포왜관도(三浦倭館圖)에도 "동래현부산포(東萊縣富山浦)"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1885년 자성대 부산진주민마을


이때까지 부산포의 ''가멸찬 ''를 사용하였는데 1470(성종 1) 1215일자성종실록釜山(부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고 富山釜山을 혼용하여 쓰다가동국여지승람(1481)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는 釜山이라는 지명으로 일반화 된 것으로 추정한다.

동국여지승람산천조에 보면, "(가마부)은 동평현(현 당감동일대)에 속해 있으며 바다에서 부산포로 들어올 때 보이는 증산(甑山 - 현 동구 좌천동)이 가마의 모양과 같으므로 이같이 일렀다고 보는데 동래부지(1740)산천조에도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의 모양과 같으므로 이 같이 일렀는데 밑에 부산·개운포의 양진(兩鎭)이 있고, 옛날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었다."라고 하고 있고, 동래부읍지(1832)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아 釜山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대체로 임진왜란이전 부산진성이 있었던 부산 동구의 증산(甑山)이 그 유래가 된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최근에는 증산에서 바다 쪽으로 맞은편에 있는 자성대(子城臺)가 부산이다라는 새로운 연구도 있지만 어쨌든 부산포가 있었던 현재의 동구지역의 증산(甑山)이나 그 주변에 있었던 가마솥모양의 산에서 부산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부산포라고 불리던 작은 부산이 어떻게 지금의 거대도시 부산이 되었을까?

 

부산은 역사적으로는 바다를 접하는 곳곳에 신석기 유적이 분포하고 있고 동래지역과 인근 내륙의 평지나 구릉지대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또한 동래근교를 거점으로 삼한과 가야의 유적 그리고 신라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하지만 부산지역이 한반도의 역사에서 특히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제대로 된 기록들이 존재하는 고려시기 그중에서도 왜구가 극성을 부렸던 고려말기로부터 예상해 볼 수 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이르는 시기까지 왜구의 침범은 국가의 안위를 위태롭게 할 정도로 극심하여 초기에는 토벌 등 군사적인 대응으로만 대처하였으나 이후에는 회유에 중점을 두었고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주거나 관직을 제수하는 등 실리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이 같은 결과로 일본 이외의 나라에 만들어진 세계 유일의 일본인 마을 왜관이 조선에 만들어졌고 왜인의 이주와 주거가 이곳에 허락되면서 왜관을 중심으로 조선과 일본의 무역이 이루어지고 평화적이고 본격적인 한일교류가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왜관 내에서 좋지 않은 사건이나 폐해, 왜란 또는 변란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되었고 이때마다 규제를 강화하고 회유책으로 폐관과 개관을 반복하였지만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모든 왜관은 폐관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우여곡절 끝에 1601년 다시 왜관은 개관되지만 오로지 부산에만 개관되어 이때부터 1876년 강제개항까지 부산 단일왜관시대에 들어서게 되었고 절영도왜관(현 영도), 두모포왜관(현 수정시장일대), 초량왜관(현 용두산공원일대)으로 위치는 이동을 했지만 폐관 없이 이전만 하였고 왜인들이 부산’(현 동구와 중구지역)에 살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부산은 원래 동래지역이 유사 이래로 지속적인 부산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주요 관아가 동래읍성을 거점으로 위치하고 있었고 고려 말에는 동평현과 더불어 동래현이 양현을 이루는 등 그 시대의 부산은 곧 동래를 말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초에는 동평현을 속현으로 두었고 임진왜란이후에는 독진이 설치되고 동래도호부로 승격이 되는 등 조선시대 중후반을 거치는 시대에도 동래가 부산의 중심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왜구의 지속적인 침략과 왜관의 관리 그리고 바다 방비의 중요도가 높아짐에 따라 동래지역과 더불어 부산의 관문인 부산의 중요성도 대두되기 시작했고 병자수호조약으로 부산포가 조선 최초의 개항장이 되고 현재의 중 · 동구를 중심으로 각국의 조계(租界)와 영사관이 들어서고 초량왜관을 거점으로 일본인들의 전용주거지인 전관거류지가 형성되면서 현재의 동구와 중구지역인 부산일대는 부산의 또 다른 중심지, 근대 부산의 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906 부산이사청


또한 경부선철도가 개통되면서 부산역을 중심으로 육지로는 서울을 거쳐 대륙으로 연결이 되고 바다로는 일본과 연결이 되는 부산의 중요한 관문으로서 현 중·동구 지역이 대두되면서 부산의 중요도는 더욱 높아졌고 세계인들에게는 조선의 관문으로써 주목을 받게 되면서 부산의 중심지로서의 부산의 역할은 더 강화 되었다. 또한 을사늑약을 전후한 시기에는 용두산 아래에 있었던 일본 영사관이 이사청으로 바뀌고 이사청이 다시 일제에 의해 시청격인 부산부청으로 변화함에 따라 일제 식민도시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일제도 부산을 부산의 중심지로써 인식하고 있었다고 짐작 할 수 있다.

 

개항초기부터 시작되었던 부산항 매축은 대륙침략 전진도시 부산을 만들기 위해 일제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고 현 중앙동 일대의 매축과 쌍산착평공사, 현 자갈치 남포동 일대인 남항매축공사, 영도 대풍포 매축공사, 부산진매축공사 등을 거치면서 세계 제6위의 무역항으로 인정받고 있는 현재의 부산항의 골격이 되어 세계인에게도 부산을 부산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인식시켜 버렸다.


▲1910년 광복동 일대


▲남포동,영도,광복동


▲엣경남도청(현동아대석당박물관)


또한 강제적이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부산이 근대도시 부산으로 발전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동래는 여전히 면과 읍, 군에 머물렀고 거기에 비례해 현 중·동구 지역인 부산은 계속되는 일본 이주민의 유입과 타 지역 조선인들의 유입으로 인해 인구는 매년 증가하고 매축을 통한 항만시설이 확보되고 도로정비와 각종 관공서의 입주, 각종 금융기관과 근대 병원의 건립, 신문물의 유통, 지식인들의 증가가 지속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근대도시로 성장하게 되어 부산은 당시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발전된 근대도시 중 하나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여기에 1915년 본격적인 전차의 개통과 1925년 진주에 있던 경남도청의 현재 동아대박물관 자리로의 이전, 1934년 영도대교의 준공은 중·동구를 거점으로 인접지역인 서구와 영도까지 부산이 점차 확대되어 나감을 보여준다.

해방과 동시에 부산은 귀환동포에게는 대한민국이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한 사람들에게는 제 2의 고향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란민들이 몰려든 100만 인구의 도시 부산, 특히 이제는 원도심이라 불리는 부산동구, 중구, 서구, 영도구지역은 총 없는 삶의 전쟁터가 되었다.


▲1934년 영도대교 준공직전


부산은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에게는 임시수도이자 피란수도로써 반격의 기지였지만 우리 아버지들에게는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 가족이라는 삶의 무게보다 가벼웠던 무거운 지게를 지고 40계단, 국제시장, 영도다리, 부두를 오가며 가족의 노래, 고향의 노래, 땀의 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었던 디딤터였고 우리 어머니들에게는 갖은 행상과 눈치에도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기를 수 밖에 없었던 숨긴 눈물의 자리였다.


▲1950년대 초 국제시장

▲1952년 보수천변 피란민 움막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부산에 남은 이들은 겨우 몸을 누울 자리라도 있다면 부산을 택하고 누웠다. 부산역과 부두가 있었기에 노무일이 있었고 물자가 들어왔기에 돈이 있었다.

그렇게 부산역과 부두를 터전으로 집들은 켜켜히 산으로 올라가고 국제시장에서 만들어진 자본은 부산각지로 흘러 부산의 공업화에 일조를 하게 되었고 5~60년대 경공업발전과 기계공업의 발전의 모태가 되었다. 거기에 수출우선정책에 부흥하고자 사상공단이 들어서면서 부산은 70년대 초반 인구 200만을 넘는 거대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항 재개발과 더불어 이제는 우수한 항만을 가진 동북아 물류 허브로서 무한한 발전 가능성에 주목을 받고 있다.


▲1960년대 초 영주동


▲1967년 서면로타리


▲1950년 부산항


이렇게 부산은 점점 커지고 성장하면서 부산이 되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부산은 부산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고 그 속에 많은 이야기를 간직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을 지니고 있는 곳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부산의 역사와 이야기들은 급작스런 변화와 발전 그리고 무관심속에서, 새로 만들어진 부산의 이미지에 밀리고 압박을 받으면서 골목과 집들 사이에서 정리할 틈도 없이 사라지고 덧칠되고 무너지고 흩어져 왔다. 그리고 일제와 가장 먼저 부딪히면서도 굴하지 않았던 부산사람들의 항일의식은 많은 독립열사들을 배출하고 일제에 대항한 치열했던 항일운동으로 전개 되어가면서 부산사람들의 민중의식으로 성장했고 시대가 바뀌면서 산업적, 정치적 억압과 압제에 맞서서는 노동운동으로 민주화운동으로 표출되었지만 이제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시대의 빠른 변화 속에서 안타깝게도 흩어지고 어른들의 입을 통해 가끔 회자되거나 청년들에게는 아예 잊힌 채로 사라져 가는 느낌이다.

 

안타까운 마음을 추스르고 부산을 바라본다.

부산의 변두리로 인식되고 상대적으로 소외받았던 부산이 최근 도시재생사업이니 산복도로 르네상스니 하는 관 차원의 여러 사업들로 조금씩 주목을 받고 부산주민들의 생활도 예전보다는 조금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감으로 기쁜 마음도 커져간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부산에 살고 있는 부산사람들에게 부산을 더 알리고 보여주는 등의 조금 더 강력하게 부산을 부산을 통해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관 차원의 사업들이 부산사람들을 향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일어난다.

 

▲부산타워에서 바라본 국제시장


▲부산타워에서 바라본 산복도로풍경


이제 부산이 그리고 부산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는지 부산사람들에게 다시 묻고 싶다.

부산을 부산에서 가난하고 낙후된 부산의 변두리로써만 생각했던 일부 부산사람들에게 부산이라는 도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답이 부산에 있음을 알리고 잘 몰랐던 부산을 여기의 이 짧은 지면을 읽음으로써 조금이라도 제대로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지를 묻고 싶다.

 

▲산복도로 야경


마지막으로 부산의 가치와 정체성은 부산을 통해서 느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해운대를 보기위해 부산을 찾았다가 우연히 부산의 산복도로에 서게 된 타지인들에게 보여 줄 것은 지금까지 부산사람들의 잣대로 만들고 인식해 버린 가난하고 낙후된 산동네의 모습이 아니다. 때로는 감추고 싶고 때로는 잊고 싶은 고통과 애환의 대한민국 근현대를 바다를 보며 소주한잔으로 풀어나갔던 부산인들의 삶과 그들의 의지이다. 그리고 밤이 되면 하늘에는 예쁜 별만 뜨지만 산복도로 아래의 집과 골목 사이에는 부산인들의 존재의 가치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별들이 뜬다는 사실도 들려줘야 한다.

 

인간의 삶보다 감동적인 것은 없다고 믿는다.

한때 그 어떤 도시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고 그 어느 도시보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고 살 수 밖에 없었던 부산이 가장 부산다운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곳이자 부산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소라 말한다면 손반장의 과한 욕심일까?

 

손반장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부산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에게 꼭 한번, 꼭 한번이라도 제대로 부산을 찬찬히 들여다보시라 말하고 싶다.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던 그리고 생각할 이유도 생각할 필요도 없는 여러 가지 답들일 수 있겠지만 부산에 살고 있는 부산사람이라면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도시 부산에 대해서 조금은 궁금하다면 부산을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시라 감히 말하고 싶다.

 

부산을 사랑하십니까? 부산은 왜 부산이라는 이름을 가졌을까요? 그렇다면 혹시 부산에 살면서 부산에 올라가 본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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